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 법사위 통과, 택배기사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 법사위 통과, 택배기사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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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 법사위 통과, 택배기사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며칠 전 택배기사들의 업무환경 개선을 위한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는 하루 평균 300개의 택배물을 배송하는 택배기사님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백화점, 쇼핑몰 등의 오프라인 쇼핑보다 쿠팡, 지마켓 등 온라인을 통해 제품을 구매하는 온라인 쇼핑이 증가하고 있는 지금, 택배기사님들의 업무환경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우리가 구매한 제품을 안전하고 빠르게 배송해주시는 택배기사님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택배기사라는 직업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역사 속에 택배기사와 같은 직업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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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택배기사 '천리인과 천리마'

'태상 4년, 고구려가 다시 사신을 보내 천리인 열 명과 천리마 한 필을 바쳤다.’(‘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5호 16국 시대 중국 남연의 왕인 모용초에게 ‘천리인’과 천리마를 선물로 보냈다. 천리인은 먼 길을 빠르게, 잘 뛰는 사람이다. 말은 당연히 사람보다 빠르지만 유지비가 비싼 게 문제였다. 말을 대신해 달리는 직업이 생겨났고,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보장사라고 불렀다. 폭설이 오거나 밥을 굶어 제대로 달리지 못해 하루라도 늦으면 벌금을 물었다. 최근 택배 종사자의 과로사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정보통 '보부상'

고구려시대의 '천리인과 천리마'가 있었다면 조선시대엔 유명한 '보부상'이 존재했다. 등짐 장수인 ‘부상’은 상업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고대에도 있었다. 다루는 상품은 주로 가내 수공업으로 만든 생활용품이었고, 하층민이 많아서 사회적으로는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조정의 지원을 받아 부상단이 만들어져 서로 도우며 활동했다. 반면 봇짐 장수인 ‘보상’은 조선 후기에 나타났다. 보상은 세공품처럼 부피가 작고 값비싼 물건을 다루었다. 보상들의 조직인 보상회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규칙을 만들어 지나친 이익을 남기거나 속이지 않도록 단속했다. 보상들의 우두머리는 ‘접장’이라고 불렀다. 보상과 부상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1883년에는 조선 조정이 혜상공국을 세우고 부상과 보상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했다. 개항 후 청과 일본 등 외국 상인의 진출로 조선 상업이 피해를 입은 데다, 보부상의 전국적인 조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할 때 보부상 1,000여 명이 동원되었고,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를 탄압할 때에도 황국 협회에 소속된 보부상단을 이용했다. 보부상들은 조정에 협력한 대가로 소금이나 철, 토기, 목기 등의 상품을 독점하여 팔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보부상은 권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특권을 누리다 보니, 새롭게 변화된 경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개항 후 일본 상인과 청 상인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쇠퇴하다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사라졌다.


조선시대 보부상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였고, 일제시대 조선독립을 위해 힘썻다. 보부상이 당시 삶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직업이었고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택배기사님들은 어떠할까. 보부상처럼 정치적인 영향력은 없지만 분명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정체성이 있을 것이다. 택배기사라는 직업이 없었으면 우리들의 그 많은 쇼핑몰은 누가 전달해줄 것이며 필요로하는 물품들을 누가 배달해 줄 것인가. 코로나 19 시대엔 더욱이 중요하고 필요한 택배기사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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