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유업 손녀 황하나와 마약, 그리고 아편전쟁

남양유업 손녀 황하나와 마약, 그리고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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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사진 첨부]

 

남양유업 손녀 황하나와 마약, 그리고 아편전쟁


2021년 새해가 밝은지 얼마되지않아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슈가 전국민에게 전해졌다.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 황하나씨가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했다는 뉴스였다. 이 뉴스가 더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그녀가 그 전에도 같은 죄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적 있다. 또한, 그녀의 음성이 담긴 녹취파일이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해당 녹취파일엔 남자친구를 포함한 친구들과 마약을 투약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많은 말이 오고간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전남자친구로 알려졌던 오 모씨는 알고보니 남편이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추고 잇는 것일까.

이처럼 같은 죄로 처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걸까. 대체 마약이란게 얼마나 중독성이 강하길래 오늘날에 법적으로 금지할까. 이번엔 마약과 관련된 역사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아편전쟁 (1840 - 1842)

 

영국은 서양에서는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에 대한 인기가 당시 대단했다. 반면 중국에선 서양의 물건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영국은 차 (茶) 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중국에서 차를 은으로 대량 매입하게되면서 많은 양의 은이 청나라로 빠져나가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되다보니 영국은 나쁜선택을 하게된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하기 시작한다. 청은 아편으로 인해 국민들의 건강이 나빠지고,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면서 경제까지 어려워지게된다. 청은 관리를 보내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빼앗아 불태워버린 후 무역을 금지시켰고, 이를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를 공격한다.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당시 영국의 신식군대를 이길 수 없던 청나라는 영국에 굴복하며 난징조약을 맺었다.

 

 

# 난징조약 (1842)

 

무능한 청나라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6백만불의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였고 양쪽 군대가 모두 철수한다는 광동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중국민들의 반발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영국군 사상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영국군은 1842년 6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영국과 굴욕적인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號)상에서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이리포와 영국 전권대사 H.포틴저가 난징조약에 조인하였다.  13조로 되어 있고, 1843년 6월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난징조약을 비롯하여 이에 이어지는 그 뒤의 여러 조약은 근대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부담하게 된 불평등조약의 단서가 되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정치 문화·영토면에서의 중국 침략에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유럽 및 일본 등 자본주의 세계의 종속적인 시장으로서 재편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징조약체결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은 그동안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중화사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근대화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


아편전쟁은 당시 잘나가던 청나라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다. 아편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생활하던 당시 중국인들, 현대에 이르러 마약에 중독되어 집행유예 중에도 마약을 상습투여하나 황하나 까지 마약은 언제나 그 끝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따.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마약관련 사건들과 아편전쟁을 미루어볼 때 공통적으로 얻어지는 교훈이 있다.

모두 '마약에 중독되면 패가망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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