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어려워지는 내 집 마련, 과거의 내 집 마련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내 집 마련, 과거의 내 집 마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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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어려워지는 내 집 마련, 과거의 내 집 마련은?


현재를 살아가는 20-30대 젊은이들의 꿈은 무엇일까. 한 설문조사 결과 1위는 '내 집 마련'인 것으로 나왔다. 그만큼 현재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지는 것은 꿈처럼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집이 마련되지 않아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높아진 집값으로 전, 월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어려운 경제상황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어려웠던 경제상황 속 선조들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 한양의 부동산 인플레이션

조선의 건국과 함께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수도를 천도하게 된다. 그로인해 많은 조정 관리 및 개경에서 생활하던 부자들은 수도로 이사를 가게 된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수도인 한양으로 이동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한양으로 이동한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사대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이 설치되고 사대문 안의 집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대문 안의 집 값은 비싸졌을까. 물론 왕궁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대문 안팎의 치안의 차이는 엄청났다. 사대문 안쪽으로는 치안이 좋았고 사대문 밖은 소위 깡촌과 다름 바 없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대문 안쪽에서 살기 원했고 그러다 보니 사대문 안의 집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 국민일보 사진참조]

조선시대 한양의 범위는 앞서 말했듯이 사대문 안으로 국한했다. 사대문 안의 집 값을 감당하지 못한 당시 백성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사대문 근처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사대문 밖에 살게 되는 백성들이 많게 되면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시급해졌다. 그로 인해 현재의 마포, 부암동, 왕십리, 한남동 등을 성저십리로 지정해 사대문 밖의 백성들을 보호하게 된다. 여기서 성저십리란 '도성으로부터 10리 (4km) 이내의 지역'을 의미한다. 즉, 한양의 크기가 커진 것이다. 이후 사대문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서울을 보면 과거 한양의 경우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지고 있다. 서울에 일자리가 많다 보니 서울에 거주하려는 인구는 많아지게 되고, 서울의 집값은 계속해서 오르는 부동산 인플레이션이 몇십 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이를 해결하고자 정부는 신도시 정책을 끊임없이 발표해왔다. 수원을 시작으로 일산, 판교 등 서울 인근의 도시에 아파트, 주택 등을 지으면서 서울의 집 값을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도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집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비싸게 집을 팔려고 하고, 반대로 집을 구입하려고 하는 사람은 싸게 사려고 한다. 조선시대보다 심해진 내 집 마련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어떻게 이 어려운 상황을 해쳐나가야 할까. 조선시대보다 무언가 더 획기적이고, 확실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부동산정책 '성저십리' ,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정책으로 해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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